요새 어린 왕자에 obsessed 되어 있다. 나이가 한 자리 숫자였던 시절에 읽었던 충격적이었던 어린 왕자의 죽음이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후유증이 크다. 이름도 모르고, 그냥 어린 왕자라니. 이름 좀 알려 주지. 그 조그만 어린이가 장미한테 상처받고 행성 사람들한테 실망하고 사막에서 물도 못 찾고 고생했던 게 섬세하게 묘사가 되어서 마음이 아프다. 특히 조종사가 어린 왕자를 안고 우물을 찾으러 가는 그 장면이 눈물 날 정도로 애틋하다. 조종사가 어린 왕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묘사되어 있어서 참 애정하는 부분이고, 따로 내가 가장 많이 울었던 구절은 여기다. '그의 발목에서 노란 한 줄기 빛이 반짝했을 뿐이다. 그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나무가 쓰러지듯 그는 천천히 쓰러졌다. 모래 바닥이라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미쳐버려 진짜. 9살에 명작동화로 각색된 책을 읽었을 때는 어린 왕자가 죽은지도 몰랐다. 직접적으로 나와있지가 않으니 '어린 왕자가 죽었다'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몰랐던 것이다. 이후에 만화로 보는 어린 왕자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그 책에선 어린 왕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조종사의 눈물이 섬세하게 잘 그려져 있어서 감정이입이 심하게 됐다. 아직도 그 그림이 나는 너무 생생한데 그 만화책은 기억도 안 나고 아무리 찾아봐도 그 작화를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 어린 왕자가 모래 위에 풀썩하고 쓰러질 때 그냥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거다. 이미 몇십 페이지의 책을 읽으면서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지다 못해 이 어린이를 사랑하게 됐는데 죽어버리다니 슬픔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린 왕자가 아주 괘씸하다. 설마 내가 장미였을 줄이야. 날 길들여 놓고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버렸다. 위로가 되는 건 무거운 육신을 두고 아이의 가벼운 영혼이 소행성 B-612로 온전히 돌아갔다는 것. 하지만 조종사는, 즉 독자는 어린 왕자가 보고 싶어서 어떡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왕자가 불쌍해 죽겠네. 내 과한 연민과 동정심이 작가의 의도를 망친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독사에게 물려 죽은 거야. 그나마 죽음이 그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덜 아프게 하지만 그래봤자 자살이잖아. 조종사 아저씨가 슬퍼할까 몰래 새벽에 죽으러 저벅저벅 사막을 걸었을 어린 왕자를 생각하니까 그냥 다시 또 눈물이 난다. 평생 지구에서 사랑만 받으며 살 수는 없었던 걸까! 그렇게 되면 어린 왕자의 지구여행 1년은 헛되게 돌아가는 거겠지... 독사를 이용한 자살이라니 어린아이의 죽음치고 너무 비극적이고 슬퍼서 후유증이 너무 오래간다.
‘나’는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우물 둘레의 돌까지 들어 올립니다. 어린 왕자가 이걸 마시면 됩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나한테 “이 물을 마시고 싶어. 물을 좀 줘.”라고 말합니다. 그럼 ‘나’는 어린 왕자에게 물을 주면 됩니다. 이때 ‘나’가 물을 주면서 깨달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어린 왕자의 말에는 단지 물을 주라는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나’는 알아챘다고 봐야 합니다. ... 어린 왕자는 지금까지처럼 ‘나’에게 의미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 의미를 깨닫게 된 겁니다. ‘이심전심’이 느껴지는 이 순간, ‘나’가 깨달은 건 무엇일까요?
어린 왕자는 ‘친구’를 원합니다. 물 마시고 싶어? 알았어, 물 줄게, 하는 그런 친구가 아니겠지요. 행간을 읽으면 어린 왕자가 원하는 건 육체적인 갈증보다 물 긷고 마시게 하는 행위에 담긴 자신에 대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보통 ‘온 마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담은 행위’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걸 이해했기 때문에 우물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 물을 “별빛 아래서의 행진과 도르래의 노래와 내 두 팔의 노력으로 태어난”, “필경 음료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 자체를 “축제처럼 즐거웠다”라고 표현합니다.
자본주의적 상품관계/인간관계 아래에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어 온 세상에 대한 인식틀과 상식, 통념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순간, ‘나’는 그런 것들을 걷어 내고 어린 왕자를 위해, 지금, 이 순간, 내 온 마음을 다해, 내 모든 힘과 열정, 의지로 물을 길어 그 물을 어린 왕자에게 마시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를 통해 ‘나’는 이 순간만큼은 이전까지 자신을 가두었던 어떤 틀과 체계, 생각, 상식이나 통념 등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한 정원 안에 장미꽃을 오천 송이나 가꾸면서도 자기들이 찾는 걸 거기서 발견하지 못할까요? 어린 왕자와 ‘나’는 그들이 찾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진리는 얼마나 소유했는지 ‘양’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요약하면, ‘나’가 어린 왕자의 죽음과 이별을 통해 또는 어린 왕자와의 ‘관계’를 통해 깨달은 건 이전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 이전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들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것, 이전의 가치체계가 아닌 새로운 가치체계, 이전의 상식과 통념이 아닌 새로운 것입니다. 상식과 통념,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갇혀 있거나 흩어져 있거나 숨겨져 있는 것들을 새로이 발견하거나 재구성하거나 찾아내는 것입니다. 단순화한 측면이 있지만, ‘어린 왕자’는 이것을 어른/아이, 문명/사막, 상품/친구 또는 상품/우물물이라는 상징적 도식을 통해 제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어린 왕자는 왜 죽었을까 < 독서일기 < 기획 < 기사본문 -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