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화장을 진하게 한 여성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새싹유치원 토끼반 선생님이 파란색 아이섀도우에 빨간 매니큐어, 패디큐어를 바르고 짙은 루주를 엄청나게 발라댔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를 사랑하셨을지는 몰라도 엄하게 대했기 때문에 나는 유치원에 가는 게 무서웠다. 어쨌든 내 주변에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엄마와 그 비슷비슷한 교회 이모들만이 수수한 얼굴로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화장을 한 여자는 본능적으로 낯설게 대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나는 엄마 몰래 젊은 이모들과 고체 파운데이션으로 놀기는 했다. 엄마의 쓰지도 않는 연필형 아이브로우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다가 혼난 적도 있었다. 엄마는 그나마 립스틱을 가끔가다 바르긴 했는데, 정말 조그만한 립브러시가 내장되어있고 한 면에는 거울이, 한 면에는 세 등분 되어 각 칸에 다른 색의 립스틱이 담겨 있는 그런 화장품이 있었다. 난 그걸 동경하곤 했다. 새싹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할 때 합법적으로 나에게 화장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기린반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버건디 색깔의 립스틱을 립브러시로 발라주셨다. 난 그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화장에 대해서는 일절 모르고 살다가(내가 아는 화장품은 챕스틱 정도밖에 없었다) 6학년 때 엄마 립스틱을 몰래 바르고 나간 적이 있다. 반 친구가 "너 틴트 발랐지?" 라는 말에 왠지 부끄러워서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틴트가 뭔지도 몰랐지만 '일부러 예뻐지기 위해 꾸민다'는 개념이 나에겐 너무 부끄러웠던 것 같다. 중학생 때에는 로드샵 화장품의 전성기였다. 에뛰드가 1순위, 토니모리 2순위, 3순위부터 미샤, 이니스프리 등등 비싸서 갖지도 못했던 베네피트 틴트 등도 유행했다. 여자아이들은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건지 렌즈 통에 비비 샘플을 여러 개 뜯어 채워넣고 다녔고 이니스프리에서 노세범 파우더를 사서 머리에 뿌렸고 오렌즈에서 소위 '개 눈 된다'고 하는 달고나 렌즈를 사곤 했다. 난 아이들이 화장하고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일단 선생님한테 혼나는 걸 보기 싫었다. 그리고 화장한 얼굴이 전혀 예쁘지도 않았다. 당연하지, 중학생 애들이 화장법에 대해 뭘 알겠냐고.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는 뭣도 모르고 그냥 살다가 겨울방학에 톰보이 노릇을 하겠다고 머리를 숏컷으로 자른 적이 있었다. 참 멍청한 짓이었다. 그냥 눈썹 정리나 할 걸. 그리고 난 그 숏컷을 한번도 정리하러 미용실에 가지 않고 그대로 기르게 내버려 두었다. 이것도 참 멍청한 짓이었다. 졸업사진에 그 거지같은 머리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하반기나 되어서야 나는 외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집에 왜 있는지 모를 샛노란 오버핏 후드집업이 있었는데 그걸로 한아름송이 야상에 굴하지 않고 멋을 내겠다고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건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귀여운 아이템이었다. 물론 나에게 썩 어울리진 않았지만.
그 비슷한 시기에 나의 첫 화장품이자 첫 틴트를 샀다. 그건 바로 '이니스프리 에코 후르츠 틴트 02 오렌지' 였다. 향에서 진짜 오렌지 맛이 났다! 그걸 주구장창 교복 치마 주머니에 들고 다니면서 입술을 물들이고 다녔는데 선생님들의 복장 지도가 워낙 엄해서 자주 바르지는 못하고 학원 갈 때나 발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탐내서 샀던 것은 키스미 아이라이너였다. 이건 솔직히 한 번도 제대로 쓰지 못하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어떻게 쓰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어서 참 민망하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는 '토니모리 립톤 겟잇틴트'를 샀다. 그건 정말 착색이 심해서 난 너무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같은 반 친구가 생일 선물로 베네피트 차차틴트를 받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저렇게 좋을까' 싶으면서도 살 엄두를 못 냈던 베네피트 틴트를 가진 것은 부러워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페리페라 페리스틴트 워터 만다린' 틴트를 구매했다. 틴트를 바르고 등교한 것을 선도부 학생이 벌점을 매기려는데 교생선생님이 막아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지. 그 후로 좀 창피해서 적어도 틴트를 바르고 등교를 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유튜버 씬의 아이섀도우 팔레트, 브러쉬 세트를 구매했다. 생각해보면 나름 쓸 만하고 합리적인 구매였는데 난 그걸 산 것을 굉장히 후회했다. 왜냐하면 아이섀도우를 쓸 줄을 몰라 거의 처박템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아멜리 플랫립스 뱀파이어'를 구매했다. 피로 물든 듯한 입술을 굉장히 동경했다. 지금 내 프로필 사진의 인형처럼. 그리고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에는 그것과 잘 어울리는 '크리니크 치크 콜라팝'도 구매했다. 그건 정말 2018년 크리스마스 때 한번 써보고 더이상 쓰지 않아 비싼 값에 팔아버렸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는 미국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면세점에서 꼭 사리라 생각했던 것이 '에스티로더 더블 웨어 스테이 인 플레이스 메이크업 파운데이션' 이었다. 참 비싼 파운데이션이었지만 외국 친구가 추천했던 제품이라 꼭 구매하고 싶었다. 같이 갔던 교회 이모는 정말 못마땅해했지만(아마 스무살 치고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셨을 것) 난 그 당시에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야 솔직히 살 수 있어도 안 사는 것들이 많다. 여동생과 친구들에게서 안 쓴다고 버리는 것을 받아오는 것도 많고 구매력이 되니까 오히려 선택지가 높아져 혼란스럽다. 입술 화장을 제외한 것들은 기본템으로만 연명하고 있다. 지금 가장 잘 쓰는 화장품은 '힌스 세컨 스킨 파운데이션 17호 포슬린', '바닐라코 프라이머 피니쉬 파우더', '페리페라 오버 블러 틴트 10 최애의 로즈' 등이 있다. 사실 화장품 이름이야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는 화장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속눈썹 펌도 하고 눈썹 정리도 하고 수염도 깎고 틴트 없이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지만 미니멀리스트가 된다면 화장품부터 버리지 않을까 싶다.